[상속과 자산] 다 쓰고 죽는 노인들, 유산에 집착하는 한국과 나에게 투자하는 서구권

지난 글에서는 나이라는 숫자에 밀려나듯 퇴직하는 우리의 씁쓸한 현실과, 능력을 기준으로 서서히 일터를 떠나는 선진국의 점진적 은퇴 문화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은퇴 후의 일상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을 마쳤다면, 이제 가장 현실적이고도 민감한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바로 평생을 바쳐 모은 내 재산을 마지막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은 자녀를 위해 끝까지 지갑을 닫고 아파트를 껴안은 채 살아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상속 문화와, 내 행복을 위해 자산을 남김없이 소진하라고 외치는 서구권의 도발적인 은퇴 철학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1. 풍요로운 상속과 빈곤한 삶, 한국 노년의 딜레마

대한민국 노년층의 삶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수억 원, 길게는 십수억 원에 달하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본인의 점심값 만 원을 아끼기 위해 먼 길을 걸어 무료 급식소를 찾거나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기형적인 현상의 바탕에는 자식에게 빚은 물려주지 못할망정 번듯한 집 한 채라도 남겨주어야 한다는 지독한 내리사랑과 유교적 상속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평생을 허리띠 졸라매며 자식 뒷바라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녀의 경제적 기반을 걱정하며 자신의 노후 자금을 봉인해 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산은 풍요롭지만 삶의 질은 턱없이 빈곤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들의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2. 서구권의 도발적인 은퇴 철학,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

반면 서구권, 특히 미국과 유럽의 시니어들 사이에서는 전혀 다른 은퇴 철학이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미국의 재정 컨설턴트 스티븐 폴란이 주창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라는 개념이 대표적입니다. 이 철학의 핵심은 아주 명쾌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발행한 수표가 잔고 부족으로 부도 처리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서구권의 노인들은 자신이 평생 일군 자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은퇴가 시작됨과 동시에 집의 평수를 줄이거나 리버스 모기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산을 현금화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세계 여행, 취미 생활, 고급 크루즈 탑승, 그리고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양질의 의료 서비스에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자식에게 남겨줄 돈으로 지금 당장 나의 삶을 가장 눈부시게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3. 나를 위한 소비가 자녀를 위한 최고의 배려다

한국의 정서로는 이러한 서구권의 문화가 다소 이기적이고 매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만 안위만 챙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부모가 자신의 자산을 온전히 스스로를 위해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이자 사랑입니다.

부모가 돈을 아끼다 병을 키우거나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 부양의 책임과 막대한 간병비는 고스란히 자녀의 어깨 위로 떨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신의 돈을 충분히 활용하여 좋은 환경에서 건강을 관리하고, 전문가의 돌봄 서비스를 받으며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자녀는 부모의 노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인생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서구권의 자녀들이 부모의 상속을 기대하지 않는 대신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죄책감이나 부담감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남겨야 할 것은 통장의 숫자가 아닌 아름다운 기억

이제 우리도 자식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서울의 낡은 아파트 한 채, 혹은 통장에 찍힌 몇억 원의 숫자가 자녀의 인생을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막대한 유산은 형제간의 끔찍한 법적 분쟁을 낳고 가족의 뿌리를 흔드는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유산은 부모가 은퇴 후에도 얼마나 활기차고 존엄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다 떠났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나의 마지막 여정을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배우자와 함께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하십시오. 상속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는 순간, 100세 시대를 채워갈 새로운 여유와 자유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음 편 예고

돈을 나를 위해 쓰는 법을 배웠다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돈을 쓸 수 있는 체력입니다. 하지만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건강 수명]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 북유럽의 예방 의학 중심 헬스케어에서는 병상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유독 긴 한국의 현실과, 죽기 전날까지 자전거를 타는 북유럽 시니어들의 건강 관리 비결을 심층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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